2010년 02월 18일
거리의 재발견 ③ 방산시장 베이커리 골목
시장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시장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어린 소년 포레스트 검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에 담겨 있는 초콜릿과 같다. 수많은 초콜릿을 넣은 박스를 앞에 두고 바로 다음 순간 어떤 맛을 꺼내 먹을 지 알 수 없듯 어떤 인생을 선택할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단다.” 이미 구성된 초콜릿 상자에의 선택에 만족하지 않고, 제 인생을 담은 자신만의 초콜릿을 향해 행복한 도전을 행하는 이들이 가득한 곳이 있다. 각종 이벤트 데이와 졸업 그리고 입학 시즌을 맞아 더욱 활기를 띠는 방산시장 내 ‘베이커리 골목’으로 향했다. 처음 방산시장을 방문하는 이들이 베이커리 골목을 찾기 위해서는 을지로 4가와 5가 사이의 ‘방산시장’이라는 대형 현판이 걸려 있는 입구를 지나 포장 원자재나 인쇄, 판촉물 등을 주로 판매하는 지류 도매상들 사이로 걸어가야 한다. 방산시장은 1987년경 인쇄업체들이 모여든 시장이라는 명성답게 각종 인쇄물과 포장지 등을 파는 가게들로 가득하다. 지물포를 따라 걷다가 처음 만나는 갈림길에서 청계천 쪽 대각선 상가로 들어서면 그곳이 바로 베이커리 골목이다. 원래 이곳의 가게들은 방산시장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인 60년대부터 제과점에 물품을 대는 도매상 밀집지로 알려져 있었다. 제과점에 들어갈 기구를 파는 곳이 먼저 생겼고,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재료상이 자리를 잡으면서 알만한 이들에게는 제법 입소문이 난 베이커리 골목이 형성된 것이다. 10여분 남짓이면 오갈 수 있을 정도의 비좁은 골목 사이로 수십 개의 제과제빵 전문 가게들이 옹기종기 둘러 모여 있다. 이곳 베이커리 골목 가게들의 매력은 5000여 종의 제과ㆍ제빵 재료부터 기구에 이르기까지 원스톱(one-stop) 쇼핑도 가능하며, 이와 달리 특화된 전문 매장들에서는 개인이 원하는 개별 전문 제품들도 구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초심자가 맨 먼저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은 방산시장 간판 밑 벽지매장들 사이 촘촘히 박혀 자칫 지나치기 쉬운 베이커리 관련 종합매장들이다. 이곳에서는 빵과 과자 그리고 초콜릿 재료, 파우더에서 포장지, 박스 그리고 각종 도구들이 달콤한 유혹을 보낸다. 쿠키 한번 구워본 적 없는 이가 조그마한 컵케이크를 만들겠다는 제법 거창한 마음을 먹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라면 예쁜 컵케이크 캐릭터 틀과 베이킹파우더와 초콜릿, 그리고 이를 예쁘게 포장할 일회용 용기, 비닐 포장지 그리고 박스 등을 단박에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빵ㆍ과자를 원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 그렇지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독특한 빵과 과자를 만들려는 이들이라면 조금 번거롭더라도 자신만의 간판에 자부심을 지닌 전문매장들을 찾는 것이 좋다. 가게 이름에 따라 취급하는 제품에도 다소 차이가 있다. 베이커리와 관련된 도구와 틀을 파는 곳은 이름이 주로 ‘공업사’로, 버터, 베이킹파우더, 초콜릿, 향료 등 각종 식재료를 파는 곳에는 ‘식품’ 또는 ‘상회’, 그리고 포장 재료와 박스를 판매하는 곳에는 주로 ‘재료’, ‘포장’ 또는 ‘상사’로 명명되고 있다. 세련된 종합매장보다 조금은 낡고 촌스러운 외양으로 자신들의 오랜 내공을 은근히 드러내는 가게들이 단골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베이커리 골목에 들어서면 골목 좌우로 초콜릿이나 쿠키 모양을 만드는 각종 몰드와 쿠키 커터 등의 공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우공업사'(d&b), '경훈공업사' 등에서는 각종 캐릭터 형태의 과자틀과 케익틀, 저울, 계량컵 등 제과 제빵에 관한 도구들을, '용천상회', '의신상회', '창진상회', '진진상회' 등 상회들은 제빵 관련 식재료들을 판매한다. 이곳에는 블루베리 시럽, 판젤라틴, 블랙베리 파우더처럼 국내에서는 쉽게 구하기 힘든 재료들부터 단호박가루, 녹차가루 같이 특화된 우리 고유의 식재료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가득하다. 특히 이중 '의신상회'는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김삼순 파티셰가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이곳은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훨씬 전부터 이미 전문 파티셰나 예비 파티셰들이 즐겨 찾던, 오십여 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저력 있는 매장이다. 그런가하면 청계천변의 방산시장 입구 땅콩골목에서는 수십여 가지의 신선한 견과류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대지땅콩', '공주땅콩' 등 제과재료로 활용되는 땅콩, 호두, 잣 등 전통적인 우리 견과류들을 취급해오던 이 골목의 가게들도 시대에 따라 자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전통견과류 이외에도 마카다미아, 파스타치오, 건포도 등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감각적이고 다양한 제품들을 수입ㆍ공급하여 제과제빵의 재료뿐만 아니라 전국 떡집들에 재료를 납품하는 견과류 전문업체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제는 복개된 남산 청계천이 졸졸 흐르던 시절, 창업한 가게를 이어받아 '공주상회'를 운영 중인 이상현 사장(51세)은 “이곳 방산시장도 ‘오늘은 결코 어제가 아니다’라는 진리에서 예외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변신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며, 최근 홈베이크 열풍과 떡 특수 등 뉴 트렌드를 읽을 줄 알고 그러한 수요에 맞게 물품을 공급할 줄 아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전통시장 상인들 또한 보편적인 도매상의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과 까다로운 고객들의 취향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역설하였다.
홈베이킹의 트렌드를 따라잡으며 명성을 유지한다 전국 최대 제과점 납품업체로 명성을 날렸던 방산시장 베이커리 골목은 최근 큰 변혁을 꾀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동네 제과점들이 유명 베이커리와 카페,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 샌드위치 전문점 등에 밀려나 하나둘씩 문을 닫으면서 수십여 년간 전국 최대 제과제빵 도매시장이라는 독보적 존재로서 영광을 누렸던 베이커리 골목도 자기갱신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골목에서 삼대째 50여 년 넘게 제과제빵을 전문적으로 취급해 온 '의신상회'의 지배경(62세) 사장은 “52년 선친 지중희(현 94세) 옹이 창업하실 무렵만 하더라도 이곳은 특화된 베이커리 시장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시장에 지나지 않았죠. 협신, 해광 등 4~5개 매장밖에 없던 이곳이 제가 제대하고 난 후 매장을 맡던 70년대 무렵부터 전국을 커버하는 제과점 납품업체 및 도매시장으로 거듭나면서 호황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주된 단골이던 동네 제과점들이 사라져가면서 이 골목 안 대부분의 가게들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홈 베이킹 전문업체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몇몇 매장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해 홈페이지로 주문을 받기도 하는데 저희 아들 같은 젊은이들이 매장 운영에 가세하면서 변화의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진 것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주요 매상을 담당하던 제과점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하더라도, 이곳 방산시장 베이커리 골목의 매출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홈 베이킹이 보편화됨에 따라 베이킹 관련 카페와 대형마트에서 살 수 있는 베이킹 재료들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방산시장에 대적하기에는 이르다. 오히려 전문자영업자가 아닌 학생, 직장인, 가정주부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홈 베이커들에게 방산시장은 꼭 한 번 둘러봐야 하는 홈 베이킹의 명소가 되고 있다. 실제로 방산시장 베이커리 골목을 방문하던 날, 만났던 수많은 고객들의 입에서는 ‘녹차커버춰’, ‘유산지’ ‘아몬드 파우더’ 등 전문적인 용어들이 술술 흘러나왔고, 각종 파우더에서 바닐라 향료까지 달콤하고 향긋한 제빵 재료들까지 한아름 안고 돌아가는 모습도 이곳 시장 풍경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발렌타인데이 특수를 겨냥한 초콜릿 재료만을 전문으로 하는 상가에서는 빛깔 고운 초콜릿 재료들이 젊은이들에게 절절한 사랑에의 고백을 부추기고, 신학기 특수를 맞은 이벤트용품매장들의 호객 소리가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요즘 대부분의 전통시장이 그렇듯, 이곳 방산시장 베이커리 골목의 웬만한 가게들에서도 현금과 카드 결제가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흥정이 많은 전통시장인 만큼 카드보다 현금으로 계산할 때 에누리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이치. 방산시장은 기본적으로 도매시장이지만 일반 고객들을 향한 상인들의 은근하고 유쾌한 프로포즈 때문에 흥정마저도 초콜릿만큼이나 달콤쌉싸름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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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10/02/18 21:33 | 서울의 재발견 | 트랙백 | 덧글(0)
















